F1의 머니게임 역사: 상업적 혁명과 두개의 시대
F1의 머니게임 역사: 상업적 혁명과 두개의 시대

F1의 머니게임사: 상업적 혁명의 역사

수십억 달러가 움직이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제국. 지금의 F1이다. 수백억 원짜리 머신들이 트랙을 질주하고, 전 세계 수십억 명이 시청하는 이 거대한 쇼. 하지만 75년 전 이곳은 그저 열정만으로 버텨가는 아마추어들의 놀이터였다. 이 모든 게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영국의 작은 차고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개러지팀'이라고 불리며 무시받던 영국 소규모 팀들이 벌인 반란. 그게 오늘날 연간 30억 달러가 넘는 F1의 출발점이었다.


1950-1970년대: 무질서한 시작과 개러지팀의 고통

F1은 스포츠로서는 순수했지만, 비즈니스로서는 완전한 무질서였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중앙 집중화된 상업 기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별 그랑프리 이벤트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레이스 주최 측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팀들은 매 레이스마다 참가를 보장받기 위해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참가비'를 받으며 연명했다.

페라리, 마세라티, 알파 로메오 같은 제조업체 팀들은 달랐다. 특혜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며 안정적인 참가비를 확보했다. 반면 개러지팀-garagistes이라 불리며 경멸받던 영국의 소규모 독립 팀들은 매번 생존을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말 그대로 작은 차고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들의 섀시를 직접 만들고 다른 회사의 엔진을 얹어 경주에 참가하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 '개러지팀'이었다. 그 용어 자체가 모욕이었다.

TV 중계는 더 엉망이었다. 각 지역 방송사가 개별적으로 주최 측과 계약을 맺는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팀들은 이 과정에서 어떠한 협상력도 갖지 못했다. 스폰서십도 연료나 타이어 회사 등 기술 파트너십에 국한되어 있었다. F1이 거대한 광고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

이런 시스템적 약점과 대다수 팀이 공유하던 고통이 훗날 F1의 모든 것을 손에 쥐게 될 한 남자가 등장할 배경을 만들었다.


1974-1981년: FOCA의 탄생과 FISA-FOCA 전쟁

1974년: 반란의 시작

변화는 1974년 포뮬러 원 컨스트럭터 협회(FOCA) 설립과 함께 시작됐다. 레이스 주최 측과 거대 제조업체 팀들의 막강한 영향력에 맞서 독립적인 섀시 제작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한 일종의 노동조합이었다. 핵심 인물들은 당대 F1을 이끌던 전설들이었다. 1972년 브라밤 팀을 인수한 버니 에클레스턴을 필두로, 마치 엔지니어링의 맥스 모슬리, 프랭크 윌리엄스, 로터스의 콜린 채프먼, 티렐의 켄 티렐 등이 FOCA의 구심점을 이뤘다.

1978년 에클레스턴이 FOCA의 최고 경영자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권력 투쟁이 시작됐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맥스 모슬리가 법률 고문으로 그를 보좌했고, 이들은 곧 F1의 행정을 총괄하던 FISA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전쟁의 격화

FISA-FOCA 전쟁은 F1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권력 투쟁이었다. 에클레스턴이 이끄는 FOCA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장마리 발레스트르 회장의 FISA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두 가지 근본적 갈등에서 비롯됐다.

첫째, 재정적 갈등. FOCA는 팀들이 F1의 주역인 만큼 상금 분배와 TV 중계권 협상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FISA는 모든 상업적 권리가 주관 단체인 자신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둘째, 기술적 갈등이 도화선이 됐다. FOCA 소속 영국 팀들은 '그라운드 이펙트'라는 혁신적인 공기역학 기술로 상대적으로 출력이 낮은 포드-코스워스 엔진을 사용하면서도 페라리나 르노 같은 거대 제조업체들의 강력한 터보 엔진과 대등하게 경쟁했다. 발레스트르는 '안전'을 명분으로 그라운드 이펙트를 금지하려 했고, FOCA는 이를 자신들의 기술적 우위를 무력화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받아들였다.

1980년 스페인 그랑프리가 전쟁의 정점이었다. FISA가 FOCA 소속 드라이버들에게 부과한 벌금 문제로 갈등이 폭발하자, 페라리, 르노 등은 레이스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FOCA 소속 팀들은 스페인 국왕의 지지 하에 레이스를 강행했고, 이 경기는 월드 챔피언십 포인트가 부여되지 않는 비공식 경기로 치러졌다. FOCA가 FISA의 승인 없이도 독자적으로 그랑프리를 개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1981년: 해적 레이스와 협상 테이블

1981년 에클레스턴과 FOCA는 승부수를 던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독자적인 레이스를 개최한 것이다. 이 경기는 FISA의 규정을 피하기 위해 '포뮬러 리브레' 형식으로 열렸으며, FOCA 소속 팀들은 FISA가 금지한 '슬라이딩 스커트'를 장착하고 경기에 나섰다. 이 '해적 레이스'는 FOCA에게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겼지만, 전략적으로는 눈부신 한 수였다. FOCA가 FISA의 승인 없이도 월드 챔피언십 수준의 대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증명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발레스트르가 미국 롱비치 그랑프리 주최 측을 압박했지만, 그의 가장 충실한 동맹이었던 르노가 미국 시장에서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FISA의 방침과 관계없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페라리도 실리를 좇아 르노를 따랐다. 가장 믿었던 동맹들에게 배신당한 발레스트르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다.


1981년: 콩코드 협정과 새로운 질서

1981년 1월,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위치한 FIA 본부에서 마라톤 협상이 벌어졌다. 13시간에 걸친 지리한 논의 끝에 F1의 미래를 규정할 역사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협상이 열린 장소의 이름을 따 '콩코드 협정'이라 명명됐고, 1981년 3월 11일 공식 서명됐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지만, 알려진 원칙들은 혁명적이었다:

참가 의무화: 협정에 서명한 모든 팀은 월드 챔피언십의 모든 라운드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했다. 이는 F1을 산발적인 이벤트의 집합이 아닌, 시즌 내내 일관성을 갖춘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었다.

규정의 안정성: 기술 규정 변경에 대한 명확한 절차를 확립했다. 향후 기술 규정 변경에는 모든 팀의 만장일치가 필요하도록 하여 특정 세력의 일방적 영향력 행사를 차단했다.

상업적 권리의 이양: 가장 중요하고 혁명적인 조항은 F1의 TV 중계권을 포함한 상업적 권리 협상권을 FOCA에 부여한 것이었다. 이는 버니 에클레스턴이 F1을 상업 제국으로 키워나갈 수 있는 결정적인 무기가 되었다.


1987-2001년: 제국의 건설과 100년 계약

1987년: FOPA의 등장

콩코드 협정은 FOCA의 승리였지만, 그 승리의 과실은 점차 버니 에클레스턴 개인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1987년 두 번째 콩코드 협정이 체결될 무렵, 에클레스턴은 브라밤 팀 오너 자리에서 물러나 FOPA(Formula One Promotions and Administration)라는 개인 회사를 설립했다. FOPA가 만든 수익 분배 구조는 에클레스턴의 사업적 수완을 보여줬다. TV 중계권 수익 중 49%는 FOPA가 가져가고 여기서 팀들에게 상금을 분배했다. FIA는 50%를, 팀들은 직접적으로 1%를 받았다. 또한 FOPA는 레이스 프로모터들이 지불하는 모든 개최권료를 직접 수령했다.

이후 FOPA는 FOM(Formula One Management)으로 이름을 바꿨고, 이 회사는 수십 년간 F1의 모든 상업적 활동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기구로 군림하게 된다.

2000-2001년: 세기의 거래

2000년에서 2001년에 걸쳐 이루어진 일련의 계약을 통해, 당시 FIA 회장이었던 맥스 모슬리가 이끄는 FIA는 에클레스턴의 FOM에게 F1의 모든 상업적 권리를 2110년 말까지, 즉 100년 동안 독점적으로 임대하는 계약을 승인했다. 이 전례 없는 100년 계약의 대가는 고작 3억 6천만 달러였다. F1 상업적 권리의 실제 가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다.

이 거래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에클레스턴과 맥스 모슬리의 특수한 관계가 있었다. 모슬리는 FISA-FOCA 전쟁 시절부터 에클레스턴의 오랜 친구이자 법률 고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결정적으로 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권리에 대한 공개 입찰이나 경쟁 절차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EU의 역설적 역할

가장 기묘한 측면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역할이었다. 1990년대 후반 EU는 FIA와 에클레스턴의 독점적 지위를 문제 삼으며 대대적인 반독점 조사를 시작했다. EU의 핵심 문제 제기는 FIA가 스포츠의 규제 기관 역할과 상업적 수혜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이해 상충 구조였다.

에클레스턴과 모슬리는 '100년 계약'을 EU 요구에 대한 해결책으로 포장했다. FIA가 상업적 권리를 FOM에 100년이라는 초장기간 동안 '판매'함으로써, FIA는 더 이상 F1의 상업적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 순수한 규제 기관으로 남게 된다는 논리였다. 결과적으로 에클레스턴의 제국을 해체할 수도 있었던 EU의 반독점 조사는 역설적으로 그의 100년 독점 체제를 정당화하고 공고히 해주는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

2017년: 리버티 미디어 시대의 개막

40년에 걸친 버니 에클레스턴의 절대 통치는 2017년 막을 내렸다. 미국의 거대 미디어 기업 리버티 미디어가 2017년 1월 23일 포뮬러 원 그룹 인수를 최종 완료했다. 기업 가치는 80억 달러, 지분 가치는 44억 달러에 달했다. 에클레스턴은 CEO 자리에서 물러나 '명예 회장'이라는 상징적 직함을 받았다. 그의 자리는 새로운 리더십 삼각편대가 대체했다. 체이스 캐리가 회장 겸 CEO를, 션 브래치스가 상업 운영 담당 매니징 디렉터를, 로스 브론이 모터스포츠 담당 매니징 디렉터를 맡았다.


2017-2025년: 팬 퍼스트 혁명

디지털 대전환

리버티 미디어의 전략은 에클레스턴 시대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F1을 B2B 상품이 아닌 B2C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재정의했다. 에클레스턴이 극도로 경계했던 디지털 및 소셜 미디어를 리버티는 즉시 전면에 내세웠다. 그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F1은 2017년 한 해에만 소셜 미디어 팔로워 수가 54.9% 급증하며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스포츠 브랜드가 되었다.

Drive to Survive 현상

2019년 넷플릭스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F1, 본능의 질주(Drive to Survive)》는 F1의 역사를 바꾼 '게임 체인저'였다. 이 시리즈는 레이스 결과보다는 그리드 뒤의 인간적인 드라마, 드라이버들의 개성과 팀 간의 치열한 경쟁에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F1을 전혀 모르던 전 세계의 새로운 시청자들을 끌어들였다.

팬덤의 변화는 각종 지표로 증명됐다. F1 팬의 평균 연령은 낮아졌고, 여성 팬의 비율은 두 배로 증가했다. 2023년 유고브 조사에 따르면 《본능의 질주》 시청자의 46%가 여성이었으며, 시청자의 26%는 이 시리즈를 보기 전에는 F1에 전혀 관심이 없던 '완전히 새로운 팬'이었다.

예산 상한제와 공정한 경쟁

리버티 미디어는 F1의 장기적 성공을 위해 경기 자체의 경쟁력을 높이고 재정적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FIA와의 협력을 통해 2021년부터 F1 역사상 최초로 예산 상한제를 도입했다. 예산 상한선은 2021년 1억 4,500만 달러에서 시작하여 점차 감소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상위 팀들의 무분별한 지출을 막아 팀 간 격차를 줄이고, 중소 규모 팀들이 재정적 압박 없이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2020년에 서명되어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유효한 새로운 콩코드 협정은 수익 분배 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과거 에클레스턴 시대의 극심한 재정적 불균형을 완화하고 보다 공평한 상금 분배를 지향했다.

아메리칸 드림

리버티 미디어 전략의 핵심 중 하나는 거대 시장인 미국에서의 영향력 확대였다. 기존 오스틴의 미국 그랑프리에 더해 마이애미 그랑프리(2022년 첫 개최)와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2023년 첫 개최)를 캘린더에 추가했다. 이 두 이벤트는 단순한 레이스를 넘어 일주일간 펼쳐지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축제로 기획되었다.

리버티 미디어 효과: 핵심 지표 변화

지표에클레스턴 시대 (2016년경)리버티 미디어 시대 (2023-2024년경)
소셜 미디어 팔로워약 3-4백만 명9,700만 명 이상
팬 평균 연령36세 (2017년)32세 (2022년)
여성 팬 비율약 15-20%30% (전체), 46% (DTS 시청자)
미국 그랑프리 수1개 (오스틴)3개 (오스틴, 마이애미, 라스베이거스)
연간 매출약 18억 달러34억 1,100만 달러 (2024년)

두 시대, 하나의 거인

포뮬러 1의 상업적 역사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시대로 나뉜다. 버니 에클레스턴의 시대와 리버티 미디어의 시대. 이 두 시대는 접근 방식과 철학 면에서 정반대에 가까웠지만, 각각의 시대적 소명을 다하며 오늘날의 F1을 만들어낸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에클레스턴은 무질서하고 파편화된 아마추어들의 놀이터를 프로페셔널 스포츠의 시대로 끌어올린 냉혹하고 비전 있는 개척자였다. 그는 FOCA를 결성하여 팀들의 힘을 하나로 모았고, FISA와의 격렬한 전쟁 끝에 콩코드 협정을 체결하며 F1의 상업적 권리를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절대적인 통제력과 비즈니스 모델의 정점이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에클레스턴의 독재가 필요악이었을지 모른다.

2017년 등장한 리버티 미디어는 에클레스턴이 굳게 닫아두었던 문을 활짝 열어젖힌 현대화의 기수였다. 그들은 F1을 B2C 엔터테인먼트 브랜드로 재창조했다. 《F1, 본능의 질주》와 같은 혁신적인 콘텐츠를 통해 F1의 인간적인 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 결과 F1은 젊은 세대와 여성 등 이전에는 소외되었던 새로운 팬층을 대거 흡수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두 시대는 F1의 진화에 있어 각기 다른, 그러나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에클레스턴이 F1이라는 강력한 '기계'를 만들었다면, 리버티 미디어는 그 기계가 전 세계와 소통하는 '언어'를 가르쳤다. 한 명의 독재자가 구축한 견고한 상업적 기반 위에, 미디어 기업의 현대적인 마케팅 전략이 더해지면서 포뮬러 1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거대한 글로벌 스펙터클로 완성될 수 있었다.

과연 리버티 미디어의 팬 중심 전략이 에클레스턴의 냉혹한 효율성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