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역사: 1906년 그랑프리 탄생부터 1950년 포뮬러 원 챔피언십 출범까지
F1 역사: 1906년 그랑프리 탄생부터 1950년 포뮬러 원 챔피언십 출범까지

모터스포츠의 태동부터 포뮬러 원 챔피언십의 출범 (1950년대)

1906년, 르망 교외에서 시작된 미친 발상

F1을 보다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도대체 누가 처음으로 "자동차로 목숨을 걸고 경주를 해보자"고 말했을까? 그것도 이틀에 걸쳐 1,238km를 달려야 한다는 미친 발상을 누가 냈을까?

답은 1906년 프랑스에 있다. 정확히는 르망 교외의 먼지 날리는 삼각형 도로에서 시작된 그랑프리라는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고든 베넷 컵에 빡친 프랑스인들

사실 이 모든 게 시작된 건 프랑스 자동차 클럽의 분노 때문이었다. 기존의 '고든 베넷 컵'은 각 나라마다 단 3대만 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 최대 자동차 제조국이었던 프랑스로서는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었다. "우리는 제조사가 수십 개인데 왜 3대만 보내야 하냐"는 거였다.

그래서 만든 게 바로 제조사별로 3대씩 출전할 수 있는 새로운 경주였다. 그게 바로 '그랑프리(Grand Prix)', 즉 '위대한 상'의 시작이었다.

노란 찻주전자가 세상을 바꾼 날

1906년 6월 26일 새벽 6시. 32대의 자동차가 103km 길이의 삼각형 코스 앞에 섰다. 12바퀴, 총 1,238km를 이틀에 걸쳐 달려야 했다. 당시로선 정말 미친 발상이었다.

그런데 이 경주의 진짜 승부수는 엔진 파워가 아니었다. 바로 타이어 교체 시간이었다. 당시 타이어 펑크는 15분이 넘는 지옥 같은 작업이었다. 바퀴를 완전히 분해해서 타이어를 교체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르노는 달랐다. 미쉐린과 함께 '탈착식 휠 림'이라는 혁신 기술을 개발했다. 림 전체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2-5분이면 끝. 말 그대로 게임 체인저였다.

12시간이 넘는 혈투 끝에 헝가리 출신의 페렌츠 시스가 노란색 르노를 타고 우승했다. 32대가 출발해서 11대만 완주했다. 그게 첫 번째 그랑프리의 잔혹한 현실이었다.


1920-1930년대: 황금기와 파시즘의 그림자

전쟁 이후의 부활

제1차 세계대전 공백기를 지나 1921년부터 그랑프리 레이싱이 본격 재개됐다. 1920년대는 부가티, 들라지 같은 프랑스 제조사와 알파 로메오, 마세라티 등 이탈리아 제조사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였다.

이 시기 전설이 된 인물들이 등장했다. 훗날 페라리를 창립하게 될 엔초 페라리가 알파 로메오 드라이버로 활약했고, 타치오 누볼라리 같은 불멸의 드라이버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29년 대공황, 그리고 정치의 개입

그런데 1929년 월스트리트 대공황의 여파가 모터스포츠계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많은 제조사가 재정난으로 레이싱에서 철수했고, 독일 그랑프리 같은 주요 대회가 취소되기도 했다.

이 위기의 틈을 파고든 건 다름 아닌 정치권력이었다. 1930년대 중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모터스포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동차 경주가 국가주의 선전에 완벽한 도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토 우니온에, 이탈리아 정부는 알파 로메오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그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실버 애로우'로 불리는 독일의 경주차들이 1930년대 후반 그랑프리 무대를 완전히 지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터스포츠의 '황금기'는 유럽 전체가 전쟁의 그림자에 휩싸이던 시기와 겹쳤다. 화려한 승부 뒤편에는 파시즘 정권의 정치적 야망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이 존재했다.


1940년대: 전쟁의 파괴와 기술 혁신의 역설

암흑기와 기술 발전의 모순

제2차 세계대전은 모터스포츠의 흐름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다시 군수 생산으로 돌아섰고, 많은 드라이버가 전장으로 떠났다. 서킷들은 군사 시설로 바뀌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은 모터스포츠의 기술적 토대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자동차와 항공기 기술의 거대한 실험장이었기 때문이다.

전투기 엔진 개발 과정에서 발전한 DOHC 방식이나 직분사 기술은 전후 레이싱카 엔진의 출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군용 차량 개발을 통해 축적된 내구성과 고성능 기술, 신소재, 품질 관리 기법들도 자동차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전쟁이 남긴 가장 실용적인 유산은 바로 버려진 군용 비행장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옛 공군 기지들은 넓고 포장된 활주로를 갖추고 있어, 별도의 큰 비용 없이도 즉시 레이싱 서킷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1947년: FIA의 포뮬러 1 규정 제정

1946년 FIA가 재편된 후, 중구난방이었던 경주차 규정을 통일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수많은 논의 끝에 1947년, 마침내 최고 등급의 단일 좌석 경주차를 위한 새로운 규정 **'포뮬러 1(Formula 1)'**이 제정되었다.

이 규정의 핵심은 실용성이었다. 전후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고려해 4.5리터 자연흡기 엔진1.5리터 과급 엔진의 두 가지 방식을 모두 허용했다. 이 덕분에 알파 로메오의 '알페타'같은 강력한 전쟁 전 슈퍼차저 머신들이 다시 트랙을 달릴 수 있었다.


1950년 5월 13일: 실버스톤의 역사적 첫걸음

로열 패밀리가 지켜본 순간

1950년 5월 13일, 영국 실버스톤. 과거 영국 공군 기지였던 이곳에 무려 12만 명의 관중이 몰렸다. 영국 국왕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여왕, 마거릿 공주까지 와서 F1 월드 챔피언십의 첫 경주를 지켜봤다.

그날의 주인공은 단연 알파 로메오였다. 놀라운 건 그들이 사용한 '알페타 158'이 12년 전에 설계된 머신이라는 점이었다. 1938년 태생의 차가 1950년에도 여전히 최강이었다.

세 명의 F가 지배한 그리드

'세 명의 F'라 불리던 드라이버들이 그리드를 장악했다. 니노 파리나, 후안 마누엘 판지오, 루이지 파졸리. 알파 로메오는 프런트 로우를 완전히 독점했다.

결승은 예상 그대로였다. 파리나가 폴 포지션에서 출발해 그대로 우승했다. F1 역사상 최초의 우승자, 최초의 폴 포지션, 최초의 패스티스트 랩을 모두 차지했다. 팀 동료들이 2, 3위를 차지하며 역사상 첫 번째 포디움 싹쓸이까지 완성했다.

한편 훗날 F1의 상징이 될 페라리는... 불참했다. 엔초 페라리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순위드라이버시간포인트
1위니노 파리나알파 로메오2:13:23.69
2위루이지 파졸리알파 로메오+2.6초6
3위레지 파넬알파 로메오+52.0초4

1950년대 초중반: 제조사들의 각축전

알파 로메오의 짧은 왕조

1950년과 1951년 초반까지 알파 로메오는 적수가 없었다. 12년 전 설계된 알페타가 여전히 최강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5리터 슈퍼차저 엔진은 강력했지만 연료를 너무 많이 먹었다. 두 번 급유해야 했다. 반면 페라리의 4.5리터 자연흡기 엔진은 한 번만 급유하면 됐다.

1951년 실버스톤: 페라리의 첫 승리

1951년 실버스톤에서 모든 게 바뀌었다. 호세 프로일란 곤잘레스가 탄 페라리가 알파 로메오의 아성에 첫 번째 균열을 냈다. 승부처는 연료 전략이었다.

단순한 차이였지만 결과는 극적이었다. 곤잘레스가 우승했고, 알파 로메오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충격은 알파 로메오의 F1 철수로 이어졌다. 12년간 지배했던 왕조가 한 번의 패배로 무너진 거였다.

마에스트로 판지오의 시대

알파 로메오가 떠난 자리를 차지한 건 판지오였다. 정확히는 판지오와 함께하는 팀들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조용한 거장 후안 마누엘 판지오. 그는 1951년부터 1957년까지 총 5번의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52번 출전해서 24번 우승. 거의 절반을 이겼다. 말이 안 되는 기록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판지오의 비밀은 단순했다. 그는 항상 가장 좋은 차를 탔다. 알파 로메오가 최강일 때는 알파 로메오에, 페라리가 최강일 때는 페라리에, 메르세데스가 최강일 때는 메르세데스에 있었다.


1950년대 중반: 메르세데스의 2년 천하

W196의 SF 같은 기술

1954년과 1955년. 메르세데스-벤츠가 F1에 돌아왔다. 그들의 'W196'은 당시로선 SF 영화에서 나온 것 같은 차였다. 데스모드로믹 밸브, 연료 직분사, 공기역학적 바디... 모든 게 혁신이었다.

판지오를 앞세운 메르세데스는 2년 연속 더블 챔피언을 차지했다.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는 예상보다 짧았다.

1955년 르망 참사: 메르세데스의 갑작스러운 철수

1955년 6월 11일, 모든 게 바뀌었다.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메르세데스 300 SLR이 공중으로 날아가 관중석을 덮쳤다. 83명이 사망했다. 모터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메르세데스는 즉시 모든 모터스포츠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30년간 돌아오지 않았다.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완벽한 지배가 하루아침에 끝난 거였다.


F1 DNA의 완성: 기술과 전략, 그리고 운명

1950년대가 만든 F1의 본질

1950년대 F1은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전쟁 전 그랑프리 전통의 끝이자, 현대 F1의 진짜 시작이었다.

이 시기에 F1의 핵심 DNA가 모두 완성되었다. 기술과 전략, 드라이버의 실력과 운, 정치와 경제가 얽혀있는 복잡한 게임. 한 번의 기술 혁신이 판도를 뒤바꾸고, 한 번의 사고가 강자를 무너뜨리는 잔혹한 무대.

르노의 탈착식 휠 림에서 시작된 기술 혁신의 전통, 판지오가 보여준 최고의 차를 찾아 이적하는 드라이버의 현실적 선택, 메르세데스가 보여준 압도적 기술력과 갑작스러운 철수까지. 모든 게 지금의 F1과 닮아있다.

기술이 일상으로 스며드는 긴 여정

F1에서 탄생한 기술들이 우리 일상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보면 흥미롭다. 1950년대 메르세데스 W196이 사용한 직분사 엔진 기술을 현대차가 도입한 건 무려 반세기가 지난 후였다. 1970년대 F1에서 먼저 사용된 알루미늄 차체는 최근에서야 연비 절감을 위한 경량화 목적으로 양산차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F1은 어떻게 이런 기술적 혁신을 지속해왔을까? 그 비밀은 '끝없는 진보와 규제 사이의 긴장감'에 있다.


과연 이것이 끝일까

1950년대는 F1이라는 거대한 여정의 첫 번째 챕터였을 뿐이다. 1906년 르망 교외에서 시작된 미친 발상이 1950년 실버스톤에서 진짜 모습을 드러냈고, 그 DNA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기술 혁신이 승부를 가르고, 드라이버의 선택이 역사를 바꾸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모든 걸 뒤흔드는 스포츠. 그게 바로 F1이 F1인 이유였다.

과연 이 기술 전쟁의 끝은 어디일까. 1950년대는 그 긴 여정의 시작점이었을 뿐이다.